교향시에 속하는 이곡은 핀란드 작곡가 시벨리우스의 인기 있는 레파토리로 꼽히는 음악 중 하나로 판란드의 역사를 담고 있다.
지금의 핀라드는 인구가 600만명이 되지 않는 작은 나라이기는 하지만 북 유럽의 유명한 복지국가 중 하나로 작지만 강한 나라이다.
하지만 중세에서 근대에는 회부의 침략에 시달려야만 했던 약소국이었다. 서쪽으로는 스웨덴, 동쪽으로는 거대한 러시아가 자리하고 있어 그 사이에서
맞고 터지며 견뎌온 나라이다. 러시아-스웨덴 전쟁으로 거슬러 가보자. 이 전쟁은 나폴레옹이 일으킨 유럽전쟁과 긴밀히 연결이 되어있다.
1806년 영국을 고립시킬 목적으로 스웨덴에게 압력을 넣어 대륙 봉쇄령에 참가시키려 했던 나폴레옹, 당시 나폴레옹과 러시아는 한패였다.
이렇게 1808년 나폴레옹의 의도에 의해 러시아, 스웨덴 전쟁이 발발했고 스웨덴의 영지로 존립했던 핀란드는 1809년부터 러시아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된다.
스웨덴이 러시아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하며 자신들의 영지 핀란드를 뱃긴 것이다.
이렇게 나폴레옹이 대부분의 유럽을 상대로 일으킨 전쟁은 유럽의 여러나라 특히 강국의 압제에 시달렸던 작은 나라들에서 민족의식과 애국주의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핀란드에서도 마찬가지로 민족주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당시 등장했던 엘리아스 뢴토로의 민족 영웅 서사시 칼레빌라는 핀란드 사람들의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던 대표적인 문학작품이였다 당시 수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이 영웅시에 매료가 되었고 시벨리우스 또한 그러한 인물 중 하나였다. 이렇게 여기저기서 애국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러시아는 핀란드를 지배하면서 언론을 검열했다. 이에 저항하고자 1899년 11월 3일간에 걸쳐 애국운동의 일환으로 행사가 열렸고 그중에 쓰인 음악이 오늘 소개하는 "시벨리우스 핀란디아"인 것이다.
이 행사의 마지막 순서에 열린 연극 역사적 정경 공연의 가장 마지막 곡 핀라드여 깨어나라로 사용되었고 1900년 작곡가 본인이 개작을 거쳐 교향시로 따로 출판 시켰다. 이 음악의 뜨거운 애국심을 눈치챈 러시아는 핀란드 국내에서 이곡을 연주를 불온하다며 금지시키기도 했는데 러시아의 눈이 미치지 않는 나라에서는 콘서트마다 작품명을 우스꽝스럽게 변경하여 연주하기도 했다. 그중 가장 뻔뻔한 가명 하나는 핀라드의 봄에 들어오는 즐거운 기분,
이 음악은 당시 핀라드의 국민적 투쟁을 불러일으키는 듯한 고무적이고 사나운 음률로 구성되어 있기에 위의 제목은 당치도 않았던 것 작품의 후반부에는 오케스트라의 고요함과 함께 핀란드의 송가가 들려오기 시작하는데 종종 전통 민속음악 멜로디로 오인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시벨리우스의 창작물이며 이 송가를 독립시켜 별도의 작품으로 만들기도 했다. 1914년에는 시인 베이코 안테로 코스켄니에이가 가사를 붙여 핀란드의 가장 중요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고 가사만 교체되어 찬송가 내 영혼아 잠잠하라로 쓰이며 잠시 존재했던 아프리카 국가 비아프라카 공화국의 공식 국가로 불리기도 했다.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Op.64 e단조
19세기 음악가들 가운데 가장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멘델스존의 음악적 경향을 잘 느낄 수 있는 작품 중에 하나가 바이올린 협주곡 Op.64 일 것이다. 이 작품은 멘델스존이 1838년 작곡할 계획을 세우고 그의 친구이자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자이던 페르디난드 다비드의 조언과 격려에 힘입어 1844년 9월 완성하였다. 1845년 3월 13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과의 협연으로 페르디난드 다비드에 의해 초연된 이 협주곡은 기교적인 면이나 곡의 진행에 있어 근본적으로 고전주의 시대의 협주곡의 유형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19세기 전반기에 일반적인 협주곡들이 기교적인 연주를 부각시키는 것이 유해이였던 반면에, 이 작품은 이러한 당시의 협주곡 유형을 따르지 않고 작곡가의 의도와 연주가의 의도가 잘 조화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체 3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었으며, 작곡자인 멘델스존은 각 악장을 독특하게 부각시키기보다는 모든 악장들이 하나의 작품을 이루익 위해 구상하였다. 이렇게 협주곡을 하나의 덩어리로 생각했기 때문에 원래 이 곡의 연주는 악장의 구분 없이 이어서 연주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요즈음은 악장을 나누어 하는 경우도 종종 볼수 있다.
슈만 교향곡 1번
슈만의 완성된 것으로는 첫 번째 교향곡으로, 아내 클라라 슈만과 결혼한 지 1년이 되던 1841년에 작곡되었다. 부제명인 봄처럼 매우 밝고 역동적인 느낌을 준다. 슈만은 특정 시기에 특정 장르의 곡을 몰아서 쓰는 버릇이 있었는데, 클라라와 결혼하기 전에는 주로 피아니스트로 입신하려다가 실패한 경험 때문인지 피아노곡을 상당히 많이 썼다. 그러더니 결혼 직후에는 가곡에 푹 빠졌는 지 무려 130여 곡에 달하는 가곡을 신나게 썼고, 그 이듬해에는 이 곡과 향곡 4번의 초판, 그리고 같이 시도했다가 스케치에 그친 교향곡 C단조까지 무려 세 곡의 교향곡을 한 번에 작업하는 등 교향곡에 올인하는 식이었다. 전년도까지는 가곡 위주로 작곡을 했던 슈만이 왜 갑자기 교향곡으로 창작 노선을 돌렸는 지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분분하지만, 대부분 슈만이 선배
슈베르트의 마지막 교향곡 유고를 빈 에서 찾아내 공표한 것을 계기로 들고 있다. 여기에 도시전설 마냥 신빙성이 의심스러운 에피소드까지 덧붙는 경우도 있는데, 슈만이 빈의 중앙 묘지에 있는 베토벤의 무덤을 참배하러 갔다가 묘비에 웬 펜이 하나 있는 걸 주워와 슈베르트 교향곡 발견에 대한 기사를 썼고, 또 이 교향곡을 작곡하는 데 사용했다는 식의 내용이다. 다소 각색된 느낌이 강한 에피소드지만, 슈만이 당시 교향곡이라는 장르에 대해 얼마나 강한 매력을 느꼈는 지를 설명할 때 종종 인용되기도 한다. 슈만이 이 곡을 작곡할 때 피아노 스케치를 겨우 1월 말의 나흘 만에 완성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실제로 관현악 편곡 작업까지 완료해 탈고한 것은 2월 말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실제 작곡에 걸린 시간은 한 달 정도로 추측된다. 물론 한 달도 교향곡 하나를 작곡하는 데 그리 여유로운 시간은 아니었으므로, 상당히 빨리 작곡된 것은 맞다. 클라라의 회고에 따르면, 작곡 초기에는 각 악장에 자신이 영감을 얻었다는 아돌프 뵈트거의 시 '사랑의 봄(Liebesfrühling)' 에서 따온 '봄의 태동', '황혼', '즐거운 놀이', '봄이여 안녕히' 같은 표제를 붙이려고 하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슈만 자신은 해당 시에서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는 상이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어쨌든 슈만은 완성 단계에서 붙이려 했던 표제를 모두 삭제하고, 곡 전체의 제목인 '봄' 만을 남겨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