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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마디

2008년 2월의 독립운동가 문태수(文泰洙)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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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08.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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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독립운동가 문태수(文泰洙)선생

◈ 덕유산을 호령한 호남의병장 ◈



국가보훈처(처장 김정복)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무주 덕유산을 근거로 전라도 일대에서 맹활약하다 1911년 체포되어 옥중 순국한 문태수(文泰洙)선생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문태수 선생은 경남 안의(安義) 출신이다.

1905년 상경하여 면암 최익현(崔益鉉)을 예방하였으며, 격문을 내어 의병을 모집할 방책을 상의하고 호남지방으로 내려가서 지리산에 들어가 거의(擧義)하였다.




무주(茂朱)에서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덕유산으로 가던 중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였으며, 그 후 1906년 9월 중순경에 장수양악(長水陽岳)에서 박춘실(朴春實)을 만나 그를 선봉장으로 삼고 의병진을 합세하여 계속 전투를 전개하면서 팔공산(八公山)으로 들어가 9월 하순에 장수읍을 함락시키고 일본군과 오래 교전하여 적군 30여 명을 사살하였지만 아군도 7명의 전사자를 냈다.




1907년 12월에 양주에서 각도의 의병진이 모일 때 호남군 100여 명을 이끌고 합세하니 호남창의대장에 추대되어 서울로의 진격작전에 일익을 담당하며, 무주 덕유산을 근거지로 영남·호남 및 호서일대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무주군민들은 이러한 문태수의 항일전공을 기리기 위해 1909년 4월에 공덕비를 세웠으나 일본경찰에 의해 철거되고 말았다.




1910년 대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위시하여 일본군을 도륙코자 계획을 세웠으나 적이 미리 정보를 입수하여 각도, 각 항구 등에 헌병, 수비대, 기마병 등 만여 명을 배치하여 방어에 진력하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차 덕유산으로 들어갔다.




1911년 8월 17일에 덕유산 아래 매부의 집으로 잠시 내려가 매부의 지인(知人) 조기래(曺基來)와 함께 담화하던 중 일본군에 노출되어 포위·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진주로 압송되었다가 대구감옥으로 이송, 다시 서울로 옮겨졌으며, 시종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년 2월 4일 옥중에서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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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수정일 2019-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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